1. 최근 아버지에게 나의 정체를 이야기했다. 자꾸 성사시키고 싶어 하시는 선자리(?)가 있었다. 작년 말 쯤에도 이 만남의 직접적인 연결고리인 아버지 여자친구 분께 정중히 거절의사를 밝히면서 말씀 말아주시길 어렵게 부탁드렸는데 상대편 남성분이 아직도 혼처를 못찾으셨는지 최근에 다시 푸쉬가… 이번에는 아버지 여자친구분과 상대쪽의 어머님과 아버지 이렇게 세 분이서 합이 맞으셨는지 정작 당사자인 나를 엑스트라로 두시고 얘네를 혼인시켜서 얘네는 happily ever after 정도로만 놓으시고 정작 나머지 세 분께서는 본인들의 노후를 어떻게 오순도순 보내실지를 더 자세히 생각해놓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은 혼처면 아빠께서 하세요’ 정도의 농담에서 웃으며 끝나질 않아서 ‘아빠, 그렇게 좋으면 여자친구 분께서 본인 따님을 결혼시킬 생각을 하시지 저한테까지 순번이 왜 오겠어요’ 같은 이야길 하며 진지해지다가 아빠께서 한 번 만나보라고 강하게 말씀을 하셔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1-1. 그렇게 예정보단 빠르게 충분한 준비가 없이 우리 세 가족이 저녁을 먹고 난 밤 나는 우리 회사 공터에서 아빠에게 여태껏 나의 살아왔던 이야기를 드렸다.
어릴때는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러다 어떤 일을 계기로 평범히 연애했으나 뭔가 마음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이내 시들해지고 결국 그들에게 소홀해지다 오래 못 가 미련도 남지 않게 헤어져왔던 이야기. 그 과정에서 느낀 현대 사회에서의 결혼 그리고 가족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의미, 나에게 특히 어려웠던 것들.
아빠는 처음에 인정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뭐 서울대를 간다거나 의사가 됐다거나 같은 특출나게 잘한건 없지만 웬만히 착하고 크게 어긋나지 않는 딸이었으니까.
이후로도 사소하게 말다툼을 하고, 답답함과 뭔지 모를 죄송함에 눈물도 좀 흘리고. 집중적으로 이야기가 오가던 어느 날 아빠께서는 어느날 아침 울면서 잠에서 깨셨다 했다.
그 뒤로 아빠도 나도 서로에게 무언갈 내려놓은 홀가분한 느낌이 느껴졌다.
첫 내 집에 입주하고 그 때쯤은 나도 완연히 어른일테니까. 그 때 혹시 짝꿍이 생긴다면 그래서 우리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한다면 자연스럽게 아빠한테 얘기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때 소개시켜드리면 되지 않을까. 그 쯤이 적당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아무튼 갑작스런 흐름의 사건에 주은이가 나를 살뜰하게 물어봐주고 챙겨주었다.
2. 20대 초반 아버지 일이 급격히 안좋아지면서 월세집을 전전하며 한 10년 넘게 살다가, 전셋집으로 옮겨 4년을 채워 살다가 내년의 입주를 위해 이사 나왔다. 기간이 떠버린 탓에 잠시 월세살이를 다시 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임대인으로서 임대차계약을 할걸 생각하니 이것 또한 어른의 일인가 하고 생각한다. 이 일은 어른의 맛임에는 틀림 없으나 쓰기도 쓰다. 나의 첫 집은 분양가상한제를 적용받은 집이라 의무거주기간이 있어서 들어가서 반드시 실거주하는 기간이 있어야 한다. 정황상 바로 입주는 어려워서 초반 2년은 전세를 놓을까 생각중인데 내년 봄 입주이니 적어도 올 겨울부터는 근처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사장님들께 집을 부탁드릴 예정이다. 아… 실거주하려고 (물론 2년 뒤 실거주 하겠지만) 욕심껏 선택해둔 나의 유상옵션들…
암튼 이건 사소하다쳐도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임차인을 들이는 것 자체나 (전세금은 얼마가 적당한지, 1층이라 얼마나 마이너스 해야할지, 하지만 방마다 시스템에어컨도 들여놓았고 부엌이랑 거실에 힘 깨나 줬는걸) 잔금 입주시기 이런 것들이 잘 맞지 않으면 어떻게하지 고민이 되지만 일단 한 번 해보기로
3. 계속 업무용 차량만을 타다가 드디어 업무용 차량 티도 나지 않고 업무용 차량도 아닌 온전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차가 생겼다. 아빠께서 운전하시던 2018년생 그랜저IG, 주행거리 18만km가 다 되어 (나름 중고차 세계 개념으로 분류하자면 ‘무사고차량’) 내게로 왔다. 아빠는 결국 제네시스 오너가 되셨는데 처음엔 신형 그랜저인 GN7 하이브리드를 원하셨지만 나의 권유로 GV70도 함께 후보에 올리셨다. 차 자체가 우선 여자친구 분이랑 들로 산으로 다니시는 용도에 맞는게 가장 좋았고, 성향이 막 사치하시거나 이런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중에 미련 남기지 말고 제네시스 타시길 바란건 나였다. 그 뒤로 이렇게 저렇게 아는 업계 지인들은 워낙 많으시니 이야기를 들으시고 선택하신건 GV70. 평소에 업무적으로 종종 뵈며 좋은 이미지가 있었던 영업쪽 카마스터님께서 담당을 맡아주셔서 반갑고 감사했다. 아빠와 내가 탈 차라고 멋있는 연락처 번호판도 만들어주셨다. 차량 번호판은 선택할 수 있었던 10개의 번호 중 아빠께서 어려우셨던 시절에 사셔서 꽤 오래 우리의 발이 되어주었던 파란색 아방이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수열 한자리만 살짝 다른 번호가 있길래 그걸 골랐다.
3-1. 멋지고 예쁘고 (아직 초반이라 예상일 뿐이지만) 1시간 정도 넘게 운전하면 스마트 뭐시기… 기능이 켜지면서 허리 마사지 같은게 되던데 상암에서 판교에 일이있어 꽤 길게 가던 중이었는데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놀라 들썩거렸다. 그 날 다 타고 나서도 평소에 두는 자리에 두면 누가 괴롭힐까봐 주차도 돈내고 유상 주차장에 하고 아유… 머리 위에 이고 운전하는 느낌이라 너는 좀 나중에 기스도 나고 사용감 좀 나고 난 다음에 다시 만나자 싶었다. 물려받게 된 그랜저도 아빠께서 주로 타고다니실 당시에 그랬듯 아빠 일정 없으실 땐 타고 다니라고 하시는데 (처음 몰아봤던 그 날도 ’차 상해도 괜찮으니까 자신있게 타고 가! 제네시스 아가씨 안녕히 가세용’ 하며 장난 치셨었는데) 한 번 몰아보고 나한테는 영 새 거라서 이후로는 안타고 다닌다. 맨날 집 때문에 돈 모은다고 궁색(?)한 모습 들키면 이래봬도 내 마음 속에 G70 이 달리고 있다고 나도 알 건 다 안다고 아빠랑 농담하곤 했는데 아무튼 좋더이다, 쟤네실수…
3-2. 헤드라이트에 습기가 차있는걸 우연히 발견해서 말씀드렸더니 (이게 내 업이라 기계적으로 반응해버림) 우리 직원분들도 웅성웅성, 대표님 새 차가 이게 뭐냐고 왜 이러냐 하심.
역시 대표님도 본인의 일이 되면 흥분되긴 매한가지.
등하불명이라고, 물려받은 그랑죠는 저 주행거리가 되도록 외부벨트 교환도 안했고 외부벨트며 점화플러그 코일 바꾸기로 다음주에 일정 잡힘.
옆에서 부장님께서 ’ㅋㅋㅋ 야 주미야 ㅋㅋㅋ 아빠가 너한테 이 차를 왜 줬겠니, 이제 와르르 손 봐야 하니까 그 전에 너한테 준거야‘ 라고 말씀하심.
그 와중에 수리해야하니까 현찰 준비해놓으라고 하시는 대표님…
4. 아빠께서 어깨를 크게 다치셨다. 회전근개 파열로 수술이 불가피할 정도로 상해버리셨다. 그래도 끝끝내 12월에 계획한 일정은 다 마치고서야 수술 받겠다고 고집하셔서 원하는 시기에 수술 받으실 수 있도록 수술 받으려고 하는 병원에 바로 초진 예약 잡아 진료보고 MRI도 찍었다. 다음주에 외래진료 있는데 그 날 MRI로 확인된 것들 들으면서 수술 내용과 일정 윤곽이 나올 것 같은데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이루어지길 마음으로 바란다.
4-1. 아빠께서 업무적으로 (이를테면 1에서 언급했던 것들 같은) 혹은 부녀 간의 사이에서 좀 섭섭하다 싶은 것이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을 두고 아빠께서 잔짜증 같은 것을 내실 때 부모님께서 마음과 육체적으로 노쇠해지시다 보면 다시 어린아이처럼 되어가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게 이런걸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이제 당신의 힘이 여기까진줄 알고 있었지만 세월의 이유로 그 힘이 당신께서 알던 것에 못미칠 때, 그 만큼을 나에게 기대시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잔 부스러기들을 빗질해 쓸어담는다. 일부러 아빠와 병원에서 할 일이 다 끝나면 아빠 이거 한 번 먹어볼래? 하면서 이 것 저 것 사드리는데 꼭 어릴 때 의젓하게 병원 잘 다녀왔으니 간식 먹는 기분이다. 어제는 크림치즈가 들어간 프렛즐을 맛있게 드셨고 오늘은 컵에 담아 파는 요거트와 그래놀라 토핑을 얹어 드셨다. 맛이 나쁘진 않지만 올 초 제주도 가족여행 때 드셨던 그릭요거트 만치는 못하다고 하신다. 얼마전엔 내가 종종 만들어먹는 사과+브리치즈+루꼴라 샌드위치를 해드렸는데 맛이 좀 생소하시진 않을까 했는데 그럭저럭 괜찮게 드셨던 것 같다. 아빠가 당신 손으로 사먹기엔 어색한 맛있고 좋은 것들을 나를 통해서 종종 접하셨으면 한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나 여행 다니실 때 내가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안목을 잃지 않으셨으면 한다.
5. 발레 조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든 잘 못하는 것이든 해본 적 없는 것이든 일단 짜내며 살고 있는 날들이 지나고 있다.